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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to Klemperer
1885 ~ 1973


 

 

클렘페러에게 있어 음악이란 어설픈 오락이나 위안을 위한 음악이 아니라 인간의 살아가는 노력과 결부된 엄숙한 노동임을 직감한다.

거기에는 언제나 윤리적인 긴장감이 감돈다.

 

한마디로 말하면 클렘페러의 음악은 의지의 음악이다. 힘찬, 의지의 음악. 그것도 보통 인간을 훨씬 넘어선 거인적이고 근원적인 의지의 음악이다. 그 의미에서 클렘페러의 개성은 작곡가로 말하면 베토벤에 가까운 데가 있다.


클렘페러는 타협을 몰랐다. 자기의 신념에 충실하게 음악을 하는 것이 그에게는 전부이고 주위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것은 이상하리 만큼 염두에 없었다.

그런 사람이었으므로 그의 생애는 고난과 투쟁의 연속이었던 듯하다. 그가 여러 번의 장애를 극복한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부상과 병은 그가 맞서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들 중 정말 일부에 불과했다. 극기의 싸움을 통해서만 클렘페러는 자기를 실현할 수 있었다.

 

이런 사람의 음악이기 때문에 누구나가 가벼운 기분으로 친숙해질 수 없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실제로 클렘페러의 연주는 늘 꽤 무뚝뚝하고 감각적 매력도 이따금 결여되어 있다. 다채로운 음색미라든가 깎은 듯이 아름다운 선율, 약동하는 리듬 등을 쉽게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것과 충분히 맞바꿀 만한 실제적인 것을 클렘페러의 연주에서 볼 수 있다. 알기 쉬운 입문서에 비해 난해한 철학 책에 실제로 깊은 내용이 담겨 있는 것처럼 말이다. 입문서는 물론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책을 입문서처럼 쉽게 만든다면 사색의 깊이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요즘은 책뿐 아니라 음악에서도 그런 징후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시대에 초연하고 본질만을 파내려 가는 사람은

이제 좀처럼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클렘페러라는존재가 얼마나 귀중한 존재였던가를 새삼 통감하게 된다. 정신적으로 새로운 깊이의 탐색을 원한다면 클렘페러의 유산에 지금부터라도 귀를 기있으면 한다.


이제 클렘페러의 명음반 중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들어 보자.

예수에게 향유를 부었다는 레치타티보에서 알토의 회한의 아리아에 이르는 부분이라든가 <준비하라>의 베이스 아리아에서 마지막 대단원의 합창에 들어가는 부분은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다. 칼 리히터의 음반마저도 뒤로 무르게 하는 감동이다.
지금의 기준으로는 클렘페러의 해석도 낡은 것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음감이 너무나 중후하고 템포는 때로 너무 느려 음악의 생동감을 떨어뜨린다. 연주 양식의 면에서도 문제는 도처에 있다. 그러나 이 연주는 역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야 말로 유유한 풍격이 전편을 감싸고 있고 음악의 품에 거리낌 없이 안길 수 있다. 마지막 곡 〈우리의 눈물로〉의 압도적인 장대함, 사물이 맑고 도량이 크다는 것은 바로 클렘페러의 연주를 두고 하는 말이다. 성악진도 아주 우수하고 에반겔리스트 역의 피어즈, 예수 역의 피셔 디스카우가 호연하고 있는 데다 여성 두 명, 슈바르츠코프, 루드비히도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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